대학뉴스 > 기고 게시판목록 | UN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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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d: 2026-04-23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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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생명체에게 파업은 곧 죽음이다
세포로 만드는 바이오의약품, 티끌만한 실수로도 변질 우려
파업으로 생산공정 멈추는 순간 글로벌 고객사들 등돌릴 것
생명체는 수만 개의 반도체가 정밀하게 결합된 슈퍼컴퓨터로도 아직 작동원리를 100% 규명하지 못한 최첨단의 물질이다. 자그마한 변수만으로도 어떻게 변화할 지를 전혀 알 수 없다. 대표적인 사례가 알츠하이머성 치매의 주요 원인물질로 지목받고 있는 ‘아밀로이드 베타’다. 뇌 속에서 단백질의 미세한 접힘(folding) 오류가 뇌세포의 손상·사멸을 유도하는 독성물질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 사소한 변화를 아직도 우리는 풀지 못해 근원적 치매 치료제를 개발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살아있는 세포를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바이오의약품 생산 공정은 세포 해동부터 배양-정제-충전이라는 일련의 연속공정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치밀하게 진행돼야만 하는 일종의 생명활동이다. 일반적인 공산품 제조 공정과는 결이 다른만큼 공정을 임의로 중단했다가 다시 시작하기 어려워 세포를 모두 죽여야 할 수도 있고, 자칫 최종 제품이 생명을 살리는 약이 아닌 ‘독약’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바이오의약품이 세계 유수의 주요 규제기관에서 직접 공정을 확인하고, 최종 산물을 검증하는 절차를 수없이 밟는 이유다. 사람의 몸에 직접 투약되는만큼 작은 결함만으로도 같은 공정을 밟았던 의약품 전체가 모두 폐기의 위기에 처한다. 미국 식품의약국(FDA) 등 주요 규제기관은 생산 과정에서 현행 우수의약품 제조·관리기준(cGMP)을 준수하지 않았다면 실제 제품에서는 아무런 이상이 발견되지 않더라도 해당 제품을 ‘변질’된 것으로 규정한다. 즉, 공정의 연속성이 단 한순간만 단절되더라도 해당 제품의 가치는 모두 사멸돼버릴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제품의 ‘변질’이 바이오 산업에서 보다 포괄적으로 해석되는 이유다. 제조에 쓰이는 세포주, 항체 등은 매우 민감한 생명체이기 때문에 항상성이 조금만 훼손되더라도 사멸 또는 변이가 발생해 가치가 즉각적으로 상실될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특히 바이오의약품 제조업체에서는 공정의 연속성을 한순간이라도 단절하는 사태는 필히 방지해야 한다. 현재 한 바이오의약품 제조업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사갈등이 바이오 산업의 본질적 가치와 전혀 맞지 않는 이유다. 노조법 조항에도 나와있는 것처럼 ‘원료·제품의 변질 또는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작업은 유지돼야 한다’는 기본 철칙을 바탕으로 최소한의 의약품 생산 유지는 지켜내야 한다. 회사는 ’원료·제품의 변질 또는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작업’은 유지돼야 한다는 노조법 조항을 근거로 최소한의 의약품 생산 유지는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법에 호소하고 나섰다. 원료나 제품에 대한 보전작업이 이뤄지지 못한다면 생산되고 있던 바이오의약품은 모두 폐기될 수밖에 없다. 자신이 맡긴 약을 모두 폐기해버린 업체에 다시 의약품 생산을 맡기고 싶은 제약사가 어디 있을까? 자신 또는 가족이 당장 맞아야 하는 약을 노사 갈등 문제로 인해 생산하지 않은 바이오의약품 제조업체에게 어떤 제약사나 소비자가 다시 신뢰를 가질 수 있을까? 그렇기에 바이오 산업의 노사 갈등은 기존 다른 산업 분야와 같은 해법으로 풀 수 없다는 특수성을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세포가 배지를 먹고 쑥쑥 커나가듯이 바이오산업 기업 임직원 모두 성장의 과실을 공유하는 상생의 큰 틀 안에서 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이러한 틀을 무시한 채, 기존의 노사 갈등 해법을 도모하는 것은 바이오 산업 생태계에 악영향을 끼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바이오 산업에서 만약 파업이라는 극단적 방식이 채택된다면 어떠한 문제도 해결되지 않고 결국 공멸이라는 파국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다. 바이오산업 기업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인 상생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노사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고 창의적인 해결책을 도모하는 책임있는 자세가 필요해 보인다. 김성필 UNIST 바이오메디컬공학과 교수 <본 칼럼은 2026년 4월 23일 매일경제 “[기고] 생명체에게 파업은 곧 죽음이다”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
2026-04-23
김성필
47
[매일시론] 러셀이 찾아준 아인슈타인의 꿈
러셀이 해석한 상대성이론 세계관
중앙집중형 권력에 의지하지 않아
절망의 시대 이겨내는 유일한 방법
‘관계 회복’ 뿐이라고 조언하는 듯해
버트런드 러셀은 1927년 발간한 그의 책 <사물의 분석>에서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성 이론을 통해 중앙 집중형 절대 권력 없이 개인이 하고 싶은대로 선택하고 행위 하더라도 질서가 생기고 유지되는 세상을 꿈꿨다고 말한다. 러셀은 아인슈타인의 꿈을 철학적으로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수학적, 물리학적으로 엄밀하게 이론적으로 따져가면서 가설을 세우며 증명한다. 지금 이순간 바로 여기 우리가 위치한 장소에 작용하는 중력은 태양계의 중심인 태양의 인력이 작용하기 때문에 생기는 힘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인접한 존재와의 관계로 생긴다고 일반 상대성 이론은 말한다. 아인슈타인의 꿈은 물리학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재해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중앙집중적인 힘의 존재를 그의 일반 상대성 이론 미분방정식에서 삭제하는 것이었다. 우린 지금 중앙집중형 권력과 함께 일상을 보내고 있다. 정치도 서울에 위치한 정부 중심이고, 경제와 금융도 통제하는 중앙 기관이 있고, 법도 예외가 아니며, 교육도 표준 교과 과정과 제도 하나까지 중앙 정부과 관련 기관에서 정해 내려 주는 식이다. 세계의 정세는 한 술 더 뜬다. 절대 강국이라고 불리는 몇몇 나라들이 세상의 일을 좌지우지한다. 세계 질서란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켜도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나라들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속수무책이다. 모든 일에서 손놓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평화를 그저 기도할 뿐이다. 전쟁의 시대 개인은 무능과 절망을 느끼게 된다. 절망의 시대, 희망의 메시지를 남겨준 사람과 그들의 사상에 기대게 된다. 다시 러셀의 책으로 돌아가면, 아인슈타인은 "크로폿킨의 꿈을 꿨다"고 말한다. 표트르 크로폿킨(1842-1921)은 러시아 철학자, 사상가였는데 절대 군주와 같은 강력한 권력 없이 가능한 이상적인 국가를 꿈꿨다. 그가 러시아인이고 산 시대로 미뤄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로 단정해서는 안된다. 사회주의는 강력한 중앙집중형 정부가, 공산주의는 공산당이라는 중앙 집중형 권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크로폿킨은 그런 사회를 꿈꾸지 않았다. 그의 꿈과 가장 가까운 체제를 들자면 아나키즘 정도가 있다. 그런데 아나키즘이라고 하면 다시 오해가 생길 수 있다. 아나키즘은 무정부 주의라고 치부해 버리기 때문이다. 아니다. 아나키즘은 절대적 권력을 지닌 정부를 거부하는 것이지 정부 자체를 거부하는 게 아니다. 어쨌든 크로폿킨은 사회주의, 공산주의도 아닌, 절대적인 힘을 지닌 중앙집중 권력이 없는 사회를 꿈꿨고 러셀에 의하면 아인슈타인도 그런 꿈을 꾼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지오데식 물리학 세상을 수학적으로 증명했고 중앙 집중형 권력 없는 세상이 가능하다는 일반 상대성 이론 세계관을 말해준 것이다. 절망적인 시대 상황에서 러셀에게 힘을 얻어 아인슈타인의 이론으로 무장하고 이제는 실천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우린 지금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절망을 뚫을 열쇠도 디지털 기술 속에 있다. 디지털 시대는 1989년 www 세상이 열리면서 시작됐다. 그리고 인공지능은 2016년 이세돌 9단을 이긴 알파고를 통해 화려하게 데뷔했는데 2008년 당시 미국의 경제와 금융 붕괴를 정확하게 해석한 구글 비즈니스 모델의 기반이었던 빅데이터를 가치의 기본으로 삼는다. 그런데 우린 2008년 탈중앙집중 체계를 위해 제안됐던 블록체인을 잊고 있다. 아니 투기의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암호화폐 개발에만 이용하고 있다. 러셀이 해석한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 세계관, 크로폿킨의 꿈, 그리고 블록체인 아이디어 모두 중앙집중형 권력 질서에 의지하지 않는 세상으로 이어진다. 유토피아적인 이상향이라고 비판할 수 있지만 아포칼립스로 치닫는 비이성과 탐욕의 세상에서 일반 상대성 이론 세계관, 크로폿킨의 꿈, 그리고 블록체인 아이디어 외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다른 것이 있나 생각하게 된다. 일반 상대성 이론 세계관으로 마음을 다잡고 가치의 보고인 빅데이터 세상에서 빅테크와 중앙 집중형 권력을 위해 일하는 인공지능을 블록체인과 제대로 만나게 함으로써 일반 상대성 이론이 제안한 바로 옆 존재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길만이 절망의 시대를 이겨내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러셀과 아인슈타인은 조언하는 듯하다. 조재원 UNIST 지구환경도시건설공학과 교수 <본 칼럼은 2026년 4월 17일 울산매일 “[매일시론] 러셀이 찾아준 아인슈타인의 꿈”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
2026-04-17
조재원
245
[경상시론]K-컬처와 인공지능
K-컬처가 일군 문화 생태계
‘K-인공지능’ 성장의 자양분
한국적 서사 핵심 자산 될것
K-컬처가 글로벌 콘텐츠로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BTS의 컴백 라이브는 넷플릭스를 타고 190여개국에 생중계되었고, 케데헌의 골든은 골든글로브, 그래미, 아카데미를 차례로 석권했고, 로제의 아파트는 글로벌 차트를 장악했다. K-팝은 단순히 음악장르에 그치지 않고, 거대한 생태계를 만들어 왔다. K-팝 열풍에서 시작된 관심은 영화와 드라마, 뷰티와 음식, 패션, 화장품, 문학, 애니메이션과 예술 전반으로 확장되었다. 한국 드라마는 주요 스트리밍 플랫폼의 핵심 콘텐츠가 되었고, 한국영화 ‘기생충’과 ‘어쩔수가 없다’는 세계영화제에서 인정받았고, 한강 작가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성공들은 개별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를 증폭시키며, 점점 더 강력한 세계적 흐름을 만들어 내고 있다. 얼마 전 친한파 미국인에게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K-팝 현상에서 재미있는 점은, K-팝 자체의 발전에도 있지만, 다양한 K-컬처 플랫폼이 어떻게 함께 진화하며 시너지를 만들어내는가에 있다는 것이다. 음악은 한국어 학습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고, 영화와 드라마는 한국 음식과 생활 문화로 호기심을 확장한다. 뷰티와 패션은 아이돌과 콘텐츠를 따라 움직이며 소비를 자극한다. 어느 하나의 산업 만으로는 만들 수 없는 효과가, 이 다층적 연결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된다. 이러한 문화 생태계는 한국의 글로벌 존재감을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바꿔 놓았다. 전 세계에서 한국어를 배우려는 수요는 눈에 띄게 증가했고, 전자제품·화장품·소비재를 막론하고 한국 브랜드는 강력한 K-컬처 이미지의 후광을 얻고 있다. 문화는 더 이상 취향이나 여가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 경쟁력의 중요한 축이 되었다. 우리 정부가 K-컬처를 단순한 문화상품이 아니라 핵심 국가 자산으로 다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K-컬처의 성공은 과학기술 영역에서 논의되고 있는 한국적 인공지능의 개발에도 중요한 함의를 던진다. 인공지능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알고리즘과 연산 능력, 반도체와 데이터센터에 주목한다. 물론 이러한 인프라는 두말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그러나 지능은 코드와 연산으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언어, 이미지, 이야기, 감정, 가치관,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같은 데이터를 통해서 학습된다. 이런 의미에서 AI는 본질적으로 문화를 흡수할 수밖에 없다. K-인공지능을 추진한다는 것은 우리의 독자적 기술 파운데이션을 구축한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우리 문화를 흡수하고 이해하고 생성해내는, 문화적 기반을 가진 AI를 만드는 것이다. 한국어, 한국의 역사와 감정, 미학과 서사를 깊이 학습한 거대언어모델은 영어권 지능을 단순히 번역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한국적 경험을 바탕으로 사고하고, 서술하고, 상상하는 AI가 될 수 있다. 이 점에서 한국은 매우 드문 조건을 갖춘 나라다. 한국어와 한글이라는 독립적인 언어와 문자 체계를 지니고 있고, 텍스트·영상·음악·이미지 등 방대한 문화 데이터가 이미 비트 형태로 저장되어 있다. 웹툰과 드라마, 학술논문과 대중 콘텐츠에 이르기까지, 문화적으로 밀도 높은 자료가 기계가 학습할 수 있는 형태로 축적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K-인공지능이 출발할 수 있는 중요한 자산이다. 또한, K-컬처의 성공은 왜 이것이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영화 기생충이나 한강의 소설이 세계적으로 공감을 얻은 이유는 지역성을 지웠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불평등, 상실, 욕망, 소외 같은 보편적 주제를 매우 한국적인 공간과 감수성으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그 힘은 보편성과 특수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나온다. 이는 인공지능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공지능이 점점 더 일반적인 사고 능력을 갖추게 될수록,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AI 시대에 문화가 중요할까 라기보다는, 다가올 시대에는 어떤 문화가 기본값이 되는가이다. 지능은 문명과 문화 속에서 생성된 언어와 경험의 데이터 속에서 학습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K-컬처의 성공은 분명한 교훈을 준다. 세계적 영향력은 자기 문화의 목소리에 대한 자신감, 그 목소리를 다른 문화와 연결시키려는 노력, 그리고 그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시스템에서 나온다. 이제 그 시스템의 한 축에 AI가 자리 잡고 있다. 김영춘 UNIST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 <본 칼럼은 2026년 4월 14일 경상일보 “[경상시론]K-컬처와 인공지능”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
2026-04-14
김영춘
541
[목요칼럼]특이점은 지났다, 이제는 ‘AI 경영’의 시간
AI기술 넘어 조직 운영방식 전환 필요
인구 감소 속 AI경영으로 생산성 유지
울산 산업 데이터로 AI경영 모델 선도
1882년, 에디슨이 뉴욕 맨해튼에 세계 최초의 상업용 발전소를 가동했을 때, 사람들은 전기의 시대가 즉시 도래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전기가 실제로 미국 제조업의 생산성을 끌어올린 것은 40년이 지난 1920년대의 일이었다. 경제사학자 폴 데이비드(Paul David)가 규명했듯, 전기라는 범용기술의 잠재력이 실현되기까지는 공장의 레이아웃을 재설계하고 조직 운영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경영의 전환’이 반드시 뒤따라야 했다. 기술이 아무리 혁명적이어도, 그것을 담아낼 경영 체계 없이는 생산성 통계에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다. 1987년 로버트 솔로우가 꼬집은 ‘생산성 역설’은 AI 시대인 오늘날에도 되풀이되고 있다. 인공지능의 기술적 특이점은 이미 우리 곁을 지나갔다. 대규모 언어 모델은 인간 수준의 추론 능력을 갖췄고, 생성형 AI는 코딩에서 법률 검토까지 전문 영역으로 빠르게 침투하고 있다. 물론 AI 기술 개발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지속적인 투자와 연구가 필요한 영역이다. 그러나 기술 개발에 쏟는 관심에 비해, 이를 경영 현장에서 가치로 전환하는 ‘AI 경영’은 상대적으로 조명을 덜 받아 왔다. AI 엔진을 만드는 경쟁만큼이나, 그 엔진을 장착할 ‘차체(비즈니스 모델)’와 ‘운전자(AI 경영 인재)’를 확보하는 일이 시급하다. 왜 AI ‘기술’이 아니라 AI ‘경영’인가. 에릭 브린욜프슨(Erik Brynjolfsson) 등의 연구가 보여주듯, AI가 총요소생산성(TFP) 향상으로 이어진 기업의 공통점은 단순한 기술 도입이 아니라 조직 재설계와 보완적 인적자본 투자를 병행한 곳이다. 팔란티어(Palantir)의 온톨로지(Ontology) 체계가 주목받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핵심은 특정 방법론이 아니라, 데이터를 경영적 가치로 전환하는 체계적 역량 그 자체가 기업 경쟁력의 원천이 됐다는 사실이다. AI 경영이 국가적 생존 전략이 되는 이유는 인구 구조의 변화에 있다. 거시경제학적 관점에서 노동 투입이 구조적으로 줄어들면, 자본 축적만으로는 수확체감의 벽을 넘기 어렵고 성장의 핵심 동력은 기술과 경영 혁신으로 수렴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2025년 기준 0.80명으로 2년 연속 반등했으나 여전히 OECD 최하위권이다. 산업수도 울산은 지난 10년간 제조업 임금근로자가 3만1000명 감소했고, 40세 미만 청·장년층만 2만9000명이 줄었다. 이 추세가 이어지면 2032년까지 울산 제조업 인력이 7만명 부족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다론 아제모글루(Daron Acemoglu)와 파스쿠알 레스트레포(Pascual Restrepo)의 ‘과업 기반 프레임워크’가 시사하듯, AI는 단순히 일자리를 대체하는 기술이 아니라 기존 과업을 재편하고 새로운 고부가가치 과업을 창출하는 기술이다. AI 경영은 이 과업 재편을 전략적으로 설계해, 적은 인력으로도 생산성을 유지하면서 노동 시장을 고부가가치 중심으로 재편하는 역할을 한다. AI 경영 역량은 실험실이 아니라 산업 현장과 맞닿은 교육과 실천의 접점에서 길러진다. UNIST U미래전략원은 한국동서발전의 AI 전환 추진전략과 거버넌스 체계를 설계하고, 한국수력원자력과 ‘에너지×AI 융합연구혁신센터’ 설립을 추진하는 등 에너지 산업에 AI 경영을 접목해 왔다. 울산시와 전통산업의 미래기술 융합 사업을 기획하고, 한국연구재단과 R&D 매니지먼트 지원체계를 설계하는 등 제도적 기반도 다지고 있다. 경영과학부의 AI 경영 교육, U미래전략원의 산학 프로젝트, 노바투스아카데미의 사회 보급 교육이 삼각 체계를 이루며 현장형 인재를 배출하고 있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비교우위’는 모든 것을 다 잘하는 데 있지 않다. AI 기술 개발은 당연히 지속돼야 하지만, 그와 함께 AI를 산업 현장에 접목하는 ‘경영의 표준’에서 앞서는 것이 한국에 가장 현실적인 전략이다. 울산의 산업 데이터와 UNIST의 전문성이 결합할 때, 대한민국은 AI 기술 수입국을 넘어 ‘AI 경영 모델 수출국’으로 도약할 잠재력을 갖춘다. AI 경영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울산의 공장에서, UNIST의 강의실에서, U미래전략원의 프로젝트 현장에서 이미 시작된 이 흐름을 대한민국 전체로 확산시키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이사야 UNIST 경영과학부 교수·서울대 중소벤처기업정책센터 연구위원 <본 칼럼은 2026년 4월 2일 경상일보 “[목요칼럼]특이점은 지났다, 이제는 ‘AI 경영’의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
2026-04-02
이 사야
899
[배성철 칼럼]사진과 인상파, 그리고 AI 시대의 교육
사진 등장에도 미술세계는 더 확장
AI시대 교육도 인간지성 대체 아닌
AI시대 함께 열어갈 인재양성 핵심
1839년, 루이 다게르가 세상에 내놓은 은판사진술은 단순한 기술 발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백 년간 서양 회화가 쌓아온 존재 이유에 대한 근본적인 위협이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 즉 ‘실사(實寫)’를 향해 정교하게 발전해온 회화의 세계에 사진이라는 기계가 갑자기 뛰어든 것이다. 당대 최고 미술아카데미인 파리 에콜 데 보자르는 변화를 거부하며 여전히 고전적 구도와 정밀한 묘사를 최고의 덕목으로 가르쳤다. 그러나 그 견고한 성벽 바깥에서, 몇몇 이단아들이 캔버스를 들고 야외로 나갔다.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그들은 빛이 사물에 닿는 순간의 떨림을, 같은 건초더미라도 아침과 저녁이 얼마나 다른지를,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마음이 느끼는 것을 화폭에 담으려 했다. 1874년, 이들의 첫 전시에 쏟아진 것은 조롱이었다. 비평가 루이 르루아는 모네의 작품 제목 ‘인상, 해돋이’를 빌려 ‘인상주의자들’이라 비웃었다. 그러나 그 조롱받던 이름은 미술사의 가장 빛나는 장으로 남았다. 사진이 실사의 영역을 장악하자, 회화는 오히려 해방되었다. 인간의 감정, 빛의 감각, 시간의 흐름이라는 사진이 담을 수 없는 세계로 깊숙이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사진의 충격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인상파 이후 회화는 점점 더 멀리 나아갔다. 칸딘스키와 몬드리안은 마침내 사물의 형태마저 버렸다. 색과 선과 면 자체가 의미가 되는 추상미술의 세계가 열린 것이다. 사진이라는 기술 충격은 단순히 화풍을 바꾼 것이 아니라,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시각 예술 전체를 다음 단계로 밀어붙였다. 지금, 우리는 또 다른 기술 충격 앞에 서 있다. AI는 이미 정해진 문제를 푸는 영역에서 인간의 지적 능력을 빠르게 추월하고 있다. 법률 문서 검토, 의학 영상 판독, 코드 생성, 논문 및 문서 작성.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고도의 훈련이 필요했던 지적 노동들이 AI 앞에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이 앞에서 교육계는 부랴부랴 AI 리터러시를 교육과정에 끼워 넣고, 창의력과 비판적 사고를 강조하고 있다. 이런 방법론적 대응도 필요하다. 그러나 사진의 충격이 인상파로 끝나지 않았듯, AI의 충격도 교육 방법의 혁신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 충격은 결국 가장 불편한 질문을 고민하게 한다. “교육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취업을 위한 것이라면 AI가 대체하는 직업이 늘어날수록 교육의 입지는 좁아진다. 사회화를 위한 것이라면 AI와 함께 살아가는 시대의 사회란 어떤 모습일까. 민주주의의 토대를 만드는 것이라면 알고리즘이 여론을 설계하는 세계에서 시민을 기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아니면 그 모든 것에 앞서, 교육을 통해 한 사람이 온전한 인간으로 형성되는 것인가. 이 질문들은 교육철학이 오랫동안 붙들어온 물음이다. 그러나 교육 현장은 이 질문을 계속 미뤄왔다. 입시와 취업과 성과 지표라는 일상의 무게가, 근본을 묻는 목소리를 눌러왔다. AI는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교육이 스스로와 마주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유니스트는 이 질문 앞에서 답을 구하기 위한 도전을 시작한다. 이번 달 출범하는 ‘GRIT 인재 융합학부’는 전공의 경계를 허물고 학생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며 프로젝트로 배우는 교육과정이다. 정해진 정답을 빠르게 찾는 훈련이 아니라, 아직 아무도 묻지 않은 질문을 발견하는 힘을 기르는 시도다. 이것은 살롱의 문법을 거부하고 야외로 나갔던 인상파의 실험과도 같다. 그리고 그 너머, 우리는 묻는다. 이 인재를 길러내는 행위가 궁극적으로 어떤 인간을, 어떤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가. 사진의 등장이 회화를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추상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탄생시켰다. AI의 등장 역시 인간의 지성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이 오랫동안 미뤄온 자기 자신과의 대면을 강요하고 있다. 그 불편한 질문을 먼저 붙드는 대학이, 다음 시대를 열어갈 인재를 길러낼 것이다. 캔버스를 들고 야외로 나갈 시간이다. 그 다음에는, 캔버스 위에 무엇을 그릴 것인지를 물을 시간이다. <본 칼럼은 2026년 4월 1일 경상일보 “[배성철 칼럼]사진과 인상파, 그리고 AI 시대의 교육”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
2026-04-01
배 성철
886
[안현실칼럼]창조성 높은 인재도시 울산을 꿈꾼다면
AI 시대 경쟁력은 ‘변혁형 창조성’
혁신친화적 교육·내적동기 양성 중요
영재교육 체계 통한 창조 인재 육성을
인공지능(AI) 시대 인간은 어떤 창조성(creativity)을 추구해야 할까. 마거릿 보든(Margaret A. Boden)은 창조성을 새롭고(new) 놀랍고(surprising) 가치있는(valuable) 아이디어 생산능력으로 정의했다. 보든은 창조성(creativity)을 세 범주로 나누었다. 익숙한 아이디어들을 이전에 없던 방식으로 결합하는 ‘조합형 창조성(combinatorial creativity)’, 기존의 개념 공간에서 아직 발견하지 못한 가능성을 찾아내는 ‘탐색형 창조성(exploratory creativity)’, 그리고 전에는 가능하지 않았던 아이디어를 창출할 새로운 개념 공간의 문을 여는 ‘변혁형 창조성(transformational creativity)’이 그것이다. 창조성이 더 이상 인간의 전유물이 아닌 AI 시대다. 인간과 AI는 창조성에서 어떤 분업으로 갈 것인가. AI가 조합형과 탐색형에서 강점을 갖는다면 인간이 잘할 수 있거나 노력해야 할 창조성은 짐작하는 대로다. 변혁형이다. 우리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은 2002년 인재전략 워크숍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200~300년 전에는 10만~20만 명이 군주를 먹여 살렸지만, 21세기에는 탁월한 한 명의 천재가 10만~20만 명을 먹여 살린다.” AI 시대에 맞게 번역하면 그 천재는 변혁형 창조성의 인재다. 문제는 이런 천재를 어떻게 발굴하고 기를 것인가다. “극히 높은 성과를 올린 인재는 어릴 때부터 그 편린(片鱗)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천재에 관한 연구들이 확인해 준다. 미국 등에서 조기 월반제도를 도입한 과학적 근거도 여기서 나왔다. 하지만 어릴 때 우수한 재능을 가진 아이가 끝내 꽃을 피우지 못한 경우도 있다. 특별한 교육의 필요성이 등장하는 이유다. 특히 어릴 때 탁월한 재능이 있는데도 저소득층 등 환경적 이유로 창조성 발현의 기회를 얻지 못한다면, 개인은 물론 국가, 나아가 인류의 손실이다. 천부적 재능의 발굴도 중요하지만, 그 재능을 살려줄 교육은 그래서 더 중요하다. 창조성 높은 인재의 특성 연구는 차고 넘친다. 이들은 호기심이 많고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 세상을 바꾼 변혁형 혁신가나 가장 성공한 발명가의 특성 연구도 마찬가지다. 기존의 전제나 가정을 의심하고 지금까지 없던 문제에 도전한다. 이런 특성은 쉽게 모방할 수 없지만, 창조성 높은 사람의 행동 특성을 잘 활용하면 누구든 혁신 잠재력을 키우고 소질을 개발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교육과 문화를 ‘혁신친화적’으로 바꿀 수 있다. 창조성과 관련한 또 하나의 연구는 동기에 관한 것이다. 동기는 금전보상, 승인욕구 등 외적동기와 자기 내부에서 분출되는 내적동기로 나뉜다. 연구에 따르면 외적동기는 한계가 있다. 보다 높은 창조성에 도달하려면 내적동기가 더 중요하다. 이런 내적동기는 남이 아닌 자기의 결정성이냐와 내가 이 일을 얼마나 좋아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내적동기 부여는 어릴 때부터일수록 좋다. 지금까지 창조성 인재에 관한 연구를 소개한 이유가 있다. 기업이든 도시든 국가든 창조적 파괴가 생존조건이 됐기 때문이다. 창조적 파괴는 창조성 높은 인재 없이는 불가능하다. 울산은 AI 첨단도시가 되고 싶어 한다. 이 꿈을 실현하려면 울산을 창조적으로 파괴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인재가 울산을 꽉 채워야 한다. 그것도 울산에서 새로운 개념 공간을 열 수 있는 변혁형 창조성의 인재로 말이다. 불행히도 울산은 창조성 인재의 발굴과 양성이라는 전주기(全週期)로 볼 때 취약한 고리가 있다. 시민의 높은 염원으로 탄생한 과학기술원 UNIST가 있지만, 정작 그 UNIST와 초·중등교육을 이어줄 ‘영재고’라는 인재의 다리가 없다. 울산과학고를 UNIST 부설 AI 영재고로 만들 수 있다면 울산, 나아가 세상을 바꿀, 창조성으로 무장한 20대 초·중반 박사 배출이 가능할 것이다. 더 크게 생각하고 더 멀리 바라보는 창조성 인재도시 울산. 오는 6월 지방선거가 끝나는대로 울산의 창조적 파괴를 인재전략에서부터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떤가. <본 칼럼은 2026년 3월 31일 경상일보 “[안현실칼럼]창조성 높은 인재도시 울산을 꿈꾼다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
2026-03-31
안 현실
788
[경상시론]과학자로서의 기업가
AI 발달로 실패비용 낮아지며, 기업가의 역할 과거와 달라져
더 과감히 실험하고 개선해야
인공지능(AI)이 기업의 운영 방식을 바꾸고 있다. AI가 만들어내는 변화는 공장이나 사무실 뿐 아니라, 기업가가 세상을 바라보고 의사결정을 내리는 방식에도 있다. 그동안 기업가는 불확실성 속에서 대담한 선택을 감행하는 인물로 묘사되어 왔다. 하나의 아이디어에 모든 것을 걸고, 성공 아니면 실패라는 극적인 서사를 살아가는 사람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장기적으로 살아남은 기업가들의 행보를 들여다보면, 그 중심에는 반복적인 실험과 학습이 있다. 시장 반응을 관찰하고, 제품과 사업모델 설계의 가설을 수정하며, 실패를 통해 방향을 조정한다. 과거의 실험은 느리고 비쌌다. 시제품 하나를 만드는 데 몇 달이 걸렸고, 고객 반응을 확인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실험의 실패는 곧 재무적 손실로 이어졌고, 이는 기업가로 하여금 실험을 최소화하고 한 번의 선택에 과도하게 집착하게 만들곤 한다. 많은 경우, 실패를 통해 배우기보다는 실패를 피하는 것이 합리적인 전략이었다. AI는 이 조건을 바꾸고 있다. 오늘날 기업가는 AI를 활용해 수많은 대안을 동시에 생성하고 비교할 수 있다. 제품 디자인, 기능 구성, 가격 전략, 마케팅 메시지, 심지어 비즈니스 모델의 구조까지 빠르게 실험할 수 있게 되었다. 소비자 행동 데이터는 실시간으로 분석할 수 있게 되었고, 작은 변화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도 예측이 가능하게 되었다. 실험의 속도와 규모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한 것이다. 이 변화는 기업가의 탐색(exploration) 방식을 바꾼다. 이제 하나의 아이디어에 모든 자원을 투입할 필요가 없다. 여러 가능성을 병렬적으로 시험하고, 시장에 실제로 진입하기 전 단계에서 상당 부분을 검증할 수 있다. 실패의 비용이 낮아지면서, 역설적으로 더 과감한 탐색이 가능해진다. 이는 혁신이 대기업이나 자본을 가진 소수에게만 허용되던 구조를 완화하고, 더 많은 실험을 시장에 허용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동시에 AI는 활용(exploitation) 능력을 크게 강화한다. 무엇이 잘 작동하는지를 빠르게 포착하고, 성과가 확인된 요소를 정교하게 개선할 수 있다. 과거에는 새로운 기회를 탐색하는 것과 기존 성과를 극대화하는 것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다면, 이제는 두 과정이 빠른 피드백 속에서 순환하는 구조로 결합된다. 실험과 개선이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의 경영 루틴이 되는 것이다. AI 시대의 기업가는 더 이상 직감과 결단만으로 움직이는 모험가가 아니다. 점점 과학자에 가까운 존재로 변하고 있다. 과학자는 모든 실험이 성공할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패하더라도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실패의 유무가 아니라, 실패가 정보를 남기는 방식이다. AI는 기업가가 이러한 과학적 실험 논리를 실제 경영에 적용하도록 돕는다. 실패한 제품이나 전략은 좌절이 아니라 데이터가 된다. 학습의 속도와 질이 경쟁력이 되는 시대다. 물론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과학적 실험에는 명확한 가설이 필요하다. 아무 질문 없이 데이터를 돌리는 것은 실험이 아니라 무작위 탐색에 가깝다. 어떤 문제를 풀고 싶은지, 무엇을 검증하려는지 정의하는 일은 여전히 기업가의 몫이다. AI는 답을 계산할 수 있지만, 어떤 질문이 중요한지를 정해주지는 않는다. 또 하나의 위험은 과신이다. AI가 제시하는 결과는 종종 매우 정교하고 확신에 차 보인다. 그러나 그 결과는 특정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전제한 가정 위에 서 있다. 단기 지표에 최적화된 판단이 장기적인 기술 변화나 사회적 맥락을 놓칠 가능성도 크다. AI가 강력해질수록, 인간의 해석 능력과 비판적 사고는 오히려 더 중요해진다. AI는 기업가의 역할을 재정의한다. 직감과 결단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 위에 체계적인 실험과 검증이 덧붙는다. 더 많은 아이디어를 실험할 수 있고, 더 많은 기회가 탐색된다. 실패는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더 빨리 그리고 더 저렴한 비용으로 더 많이 일어난다. AI 시대의 기업가는 직감과 결단으로 움직이는 모험가를 넘어서 점점 더 과학자에 가까운 존재로 변하고 있다. 불확실성이 상수가 된 경영 환경에서, 이러한 과학적 기업가 정신이야말로 지속적인 기업 경쟁력의 원천이 될 것이다. 김영춘 UNIST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 <본 칼럼은 2026년 3월 12일 경상일보 “[경상시론]과학자로서의 기업가”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
2026-03-12
김 영춘
718
[교수 논단] 흔들리지 않는 미래 에너지의 안정적·지속적인 확보
탄소중립과 전력수요 증가 속 원자력 필요성
에너지 산업 기반 갖춘 울산 원전 입지 여건
우리는 지금 산업경쟁력 강화와 탄소중립 실현을 위한 에너지 확보의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기후위기에 대응하고 급증하는 전력 수요를 감당할 대규모의 무탄소 전원을 언제 어디서나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이는 국가 에너지 안보를 확립하는 지름길이자 지역 산업 생태계의 선순환 구조를 완성하여 지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원동력이다. 에너지 산업 융복합단지와 원전 클러스터가 완벽하게 어우러진 에너지 산업의 심장 울산에 원자력발전소가 새로 유치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70년대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 아흐메드 자키 야마니(Ahmed Zaki Yamani)는 “돌멩이가 없어서 석기시대가 끝난 것이 아니다(=The Stone Age came to an end, but not because we ran out of stones.)”라고 하였다. 자원의 부족이 아닌 과학기술의 진보가 시대의 패러다임을 바꾼다는 반세기 전의 그의 통찰은 화석연료가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오늘날 현실이 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원자력은 국가 에너지 안보를 굳건히 하고 산업 인프라를 지탱하는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한 대규모 탄소중립 에너지원이다. 탈원전(脫原電)을 외쳤던 벨기에, 스웨덴, 스위스, 이탈리아 등 유럽 선진국들을 보라! 지구촌의 전쟁이 불러온 에너지 위기를 돌파하고 급증하는 산업전력 수요를 충당할 친환경 에너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원자력으로 회귀하는 길을 걷고 있다. 2023년 원전 폐쇄를 모두 완수하며 탈원전을 완료한 독일의 원전 재가동 논의는 ‘탄소 넷제로(Net-Zero)’를 달성하면서 국가경쟁력을 강화하고 에너지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대안이 원자력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원전이 탄소중립을 위한 주요 전력원임을 과학기술적 사실을 기반으로 재인식한 결과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울산은 원전 건설과 운영 경험을 지속적으로 축적해 오고 있는 에너지 거점 도시로서 광역 교통망, 기반 인프라, 부지, 높은 원자력 환경 공공 신뢰도 등 최적의 원전 유치 여건을 확보하고 있다. 특히, 현재 운영 중인 새울 1, 2호기는 우리나라가 독자 개발한 3세대 개선형(GEN III+) 가압경수형 원전으로, K-원전의 표준 모델(APR1400)이다. 이는 아랍에미리트(UAE)에 수출하여 운영 중인 바라카 원전의 그것과 동일한 노형으로 그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입증하였다. 우리나라는 1978년 첫 상용 원전 도입 후 수십 년 동안 축적된 원전 건설 및 운영 역량, 연구 개발을 바탕으로 원전 도입국에서 원전 수출국으로 탈바꿈하며 글로벌 원자력 선도 국가의 반열에 올라서 있다. 이렇듯 세계적으로 원전 기술력을 인정받은 우리나라의 주력 원전 노형인 APR1400이 건설, 운영되고 있는 울산의 새울 신규 원전 유치는 지극히 자연스러우며 전략적으로도 주저할 이유가 없다. 아니, 울산은 신규 원전을 수용하기 위한 최적의 맞춤형 인프라와 검증된 환경을 이미 확보하였다. 1,000MW급의 대규모 전력이 소요될 인공지능 데이터센터(SK AI 데이터센터)가 울산에 들어선다. 이는 수요처와 에너지원의 인접성을 통한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미래 산업경쟁력의 핵심임을 직접 방증하는 것이다. 전통적 제조업뿐만 아니라 인공지능, 전기차, 반도체, 스마트팩토리 등과 같은 전력 다소비 첨단산업에 대한 안정적인 전력 공급은 산업 생존의 필수 요소다. 마이크로소프트를 비롯한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원전 프로젝트 투자 및 원자력발전소 직접 전력 구매 행보는 안정적인 대규모 무탄소(無炭素) 전원 확보의 해답이 원자력에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신규 원전 유치를 통한 대규모의 안정적 에너지원 확보는 석유화학, 자동차, 조선 및 수소 등 울산의 주력 산업 활성화를 위한 필요조건이다. 더불어, 원전 건설 과정에서의 대규모 고용 창출과 원전 지역 지원금 등은 지역 경제를 향상시키고 지역민의 삶을 풍부하게 하는 실질적인 성장 엔진이 된다. 원자력을 통한 에너지 확보가 불가피한 현실로 다가온 상황에서 탄소 중립, 지역 경제 성장, 국가 에너지 안보 등 세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을 수 있는 원전의 신규 유치는 선택이 아닌 사명이다. 입지 조건을 모두 갖춘 새울 원자력부지에 신규 원전을 추가로 짓는 것은 이제 지역의 실천적 의지와 시간의 문제다. 원전의 건설부터 운영, 해체까지 아우르는 원전 전주기 생태계의 새로운 이정표가 울산에서 세워지기를 기대한다. <본 칼럼은 2026년 3월 12일 울산제일일보 “[교수 논단] 흔들리지 않는 미래 에너지의 안정적·지속적인 확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
2026-03-12
김 희령
559
[최진숙의 문화모퉁이(30)]실수로 만들어진 가나슈
실수·위험 제한하는 교육 환경
아이들이 단단해질 경험 기회 차단
다양한 실패가 건강한 성장 이끌어
새 학기, 새 학년을 맞이하는 3월의 교실은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하다. ‘새로운 도전’이라는 희망과 ‘틀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공존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최근 쉬는 시간 중 축구를 하다가 다치는 아이가 생겼다는 이유로 축구를 금지한 초등학교가 있다. 운동회에서 승자와 패자를 가르지 않도록 무승부로 끝을 내자는 학교도 있다고 한다. 또한 초등학교에서 공개적으로 상장을 주지 않고 수상자에게 조용히 따로 전달한다는 소식도 있다. 언뜻 보면 다치거나 패배한 아이들의 몸과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왜 살면서 상처를 입으면 안 되는지 의문이 든다. 학기 중 시험을 본 후 몇 등인지도 알고, 속상하거나 뿌듯해 보기도 하고, 심기일전해 보기도 하고, 선생님께 혼도 나고, 칭찬도 받고, 전교생 앞에서 상장도 받아보고, 상을 받은 친구들 축하도 해주고, 점심 때 축구와 피구를 하다가 다쳐도 깔깔대며 다시 뛰어다닐 수 있는 학교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아이들은 저절로 어른이 되지 않는다.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문턱을 넘어야 한다. 바로 고통, 위험, 실패, 공동체의 냉혹한 시선을 견뎌내는 과정이 그것이다. 인류학자들은 이를 ‘통과의례(rite of passage)’라 불러왔다. 통과의례는 잔인해 보이지만, 한 사회가 한 인간을 사회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책임지겠다는 신호이다. 고통을 통과한 사람만이 권리뿐 아니라 책임을 함께 부여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그러한 통과의례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아이들은 어려운 일을 겪으며 성장하기 보다는 처음부터 다치지 않도록 보호받는다. 상처받지 않도록, 실패하지 않도록, 좌절을 겪지 않도록 관리된다. 물론 이 변화의 배경에는 과거 교육 현장의 차별, 체벌과 억압의 기억이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단단해지는 경험’까지 함께 제거되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자녀 교육 담론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아동 인권’이다. 아이는 존중받아야 하고, 보호받아야 하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 모두 옳은 말이다. 그렇다면 동시에 아이는 세계의 냉혹함을 배울 수 있는 길도 열려있어야 하지 않는가? 권리는 선언으로 주어지지만, 책임은 경험으로 학습된다. 넘어져 본 아이만이 다시 일어나는 법을 알고, 실패를 겪어본 사람만이 좌절을 관리하는 기술을 갖는다. 그러나 부모들은 자녀가 넘어지기 전에 미리 손을 내밀고 길에 놓인 돌멩이를 치워 줌으로써 위험한 환경 자체를 경험할 기회를 제거한다. 아이는 보호될지 모르지만, 결코 돌멩이가 있는 길을 비켜 가는 법을 익히지 못하며, 설사 넘어졌다 해도 일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19세기 프랑스의 어느 초콜릿 작업장에서 한 견습생이 실수로 끓는 생크림을 초콜릿이 담긴 그릇에 쏟아버렸다. 이를 본 스승이 버럭 화를 내며 ”이 가나슈(Ganache, 바보 같은 녀석)야!“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버리려던 그 ‘실패작’ 초콜릿을 섞어보니, 전례 없이 부드럽고 매혹적인 크림이 탄생했다. 그 ‘바보 같은 실수’가 없었다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오늘날의 ‘가나슈’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또 다른 사례는 페니실린이 있다. 실험실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바람에 생겨난 곰팡이가 전 인류를 구해낸 항생제가 될 줄을 그 누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실수와 실패는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계속 시도하다 보니 우연한 성공의 길로 갈 수도 있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교육과 제도가 아이들을 독립적이고 책임감 있는 성인으로서 성숙시키지 못하고 있음에 대해 어른들의 반성이 필요한 때이다. 수많은 실수와 실패의 경험들이 아이들을 성장하게 하고, 성인이 되었을 때 다가올 혼란과 고통을 극복할 능력을 길러 줄 것이다. <본 칼럼은 2026년 3월 11일 경상일보 “[최진숙의 문화모퉁이(30)]실수로 만들어진 가나슈”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
2026-03-11
최 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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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생명체에게 파업은 곧 죽음이다
세포로 만드는 바이오의약품, 티끌만한 실수로도 변질 우려
파업으로 생산공정 멈추는 순간 글로벌 고객사들 등돌릴 것
생명체는 수만 개의 반도체가 정밀하게 결합된 슈퍼컴퓨터로도 아직 작동원리를 100% 규명하지 못한 최첨단의 물질이다. 자그마한 변수만으로도 어떻게 변화할 지를 전혀 알 수 없다. 대표적인 사례가 알츠하이머성 치매의 주요 원인물질로 지목받고 있는 ‘아밀로이드 베타’다. 뇌 속에서 단백질의 미세한 접힘(folding) 오류가 뇌세포의 손상·사멸을 유도하는 독성물질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 사소한 변화를 아직도 우리는 풀지 못해 근원적 치매 치료제를 개발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살아있는 세포를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바이오의약품 생산 공정은 세포 해동부터 배양-정제-충전이라는 일련의 연속공정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치밀하게 진행돼야만 하는 일종의 생명활동이다. 일반적인 공산품 제조 공정과는 결이 다른만큼 공정을 임의로 중단했다가 다시 시작하기 어려워 세포를 모두 죽여야 할 수도 있고, 자칫 최종 제품이 생명을 살리는 약이 아닌 ‘독약’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바이오의약품이 세계 유수의 주요 규제기관에서 직접 공정을 확인하고, 최종 산물을 검증하는 절차를 수없이 밟는 이유다. 사람의 몸에 직접 투약되는만큼 작은 결함만으로도 같은 공정을 밟았던 의약품 전체가 모두 폐기의 위기에 처한다. 미국 식품의약국(FDA) 등 주요 규제기관은 생산 과정에서 현행 우수의약품 제조·관리기준(cGMP)을 준수하지 않았다면 실제 제품에서는 아무런 이상이 발견되지 않더라도 해당 제품을 ‘변질’된 것으로 규정한다. 즉, 공정의 연속성이 단 한순간만 단절되더라도 해당 제품의 가치는 모두 사멸돼버릴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제품의 ‘변질’이 바이오 산업에서 보다 포괄적으로 해석되는 이유다. 제조에 쓰이는 세포주, 항체 등은 매우 민감한 생명체이기 때문에 항상성이 조금만 훼손되더라도 사멸 또는 변이가 발생해 가치가 즉각적으로 상실될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특히 바이오의약품 제조업체에서는 공정의 연속성을 한순간이라도 단절하는 사태는 필히 방지해야 한다. 현재 한 바이오의약품 제조업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사갈등이 바이오 산업의 본질적 가치와 전혀 맞지 않는 이유다. 노조법 조항에도 나와있는 것처럼 ‘원료·제품의 변질 또는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작업은 유지돼야 한다’는 기본 철칙을 바탕으로 최소한의 의약품 생산 유지는 지켜내야 한다. 회사는 ’원료·제품의 변질 또는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작업’은 유지돼야 한다는 노조법 조항을 근거로 최소한의 의약품 생산 유지는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법에 호소하고 나섰다. 원료나 제품에 대한 보전작업이 이뤄지지 못한다면 생산되고 있던 바이오의약품은 모두 폐기될 수밖에 없다. 자신이 맡긴 약을 모두 폐기해버린 업체에 다시 의약품 생산을 맡기고 싶은 제약사가 어디 있을까? 자신 또는 가족이 당장 맞아야 하는 약을 노사 갈등 문제로 인해 생산하지 않은 바이오의약품 제조업체에게 어떤 제약사나 소비자가 다시 신뢰를 가질 수 있을까? 그렇기에 바이오 산업의 노사 갈등은 기존 다른 산업 분야와 같은 해법으로 풀 수 없다는 특수성을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세포가 배지를 먹고 쑥쑥 커나가듯이 바이오산업 기업 임직원 모두 성장의 과실을 공유하는 상생의 큰 틀 안에서 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이러한 틀을 무시한 채, 기존의 노사 갈등 해법을 도모하는 것은 바이오 산업 생태계에 악영향을 끼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바이오 산업에서 만약 파업이라는 극단적 방식이 채택된다면 어떠한 문제도 해결되지 않고 결국 공멸이라는 파국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다. 바이오산업 기업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인 상생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노사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고 창의적인 해결책을 도모하는 책임있는 자세가 필요해 보인다. 김성필 UNIST 바이오메디컬공학과 교수 <본 칼럼은 2026년 4월 23일 매일경제 “[기고] 생명체에게 파업은 곧 죽음이다”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
2026-04-23
김성필
47
[매일시론] 러셀이 찾아준 아인슈타인의 꿈
러셀이 해석한 상대성이론 세계관
중앙집중형 권력에 의지하지 않아
절망의 시대 이겨내는 유일한 방법
‘관계 회복’ 뿐이라고 조언하는 듯해
버트런드 러셀은 1927년 발간한 그의 책 <사물의 분석>에서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성 이론을 통해 중앙 집중형 절대 권력 없이 개인이 하고 싶은대로 선택하고 행위 하더라도 질서가 생기고 유지되는 세상을 꿈꿨다고 말한다. 러셀은 아인슈타인의 꿈을 철학적으로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수학적, 물리학적으로 엄밀하게 이론적으로 따져가면서 가설을 세우며 증명한다. 지금 이순간 바로 여기 우리가 위치한 장소에 작용하는 중력은 태양계의 중심인 태양의 인력이 작용하기 때문에 생기는 힘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인접한 존재와의 관계로 생긴다고 일반 상대성 이론은 말한다. 아인슈타인의 꿈은 물리학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재해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중앙집중적인 힘의 존재를 그의 일반 상대성 이론 미분방정식에서 삭제하는 것이었다. 우린 지금 중앙집중형 권력과 함께 일상을 보내고 있다. 정치도 서울에 위치한 정부 중심이고, 경제와 금융도 통제하는 중앙 기관이 있고, 법도 예외가 아니며, 교육도 표준 교과 과정과 제도 하나까지 중앙 정부과 관련 기관에서 정해 내려 주는 식이다. 세계의 정세는 한 술 더 뜬다. 절대 강국이라고 불리는 몇몇 나라들이 세상의 일을 좌지우지한다. 세계 질서란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켜도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나라들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속수무책이다. 모든 일에서 손놓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평화를 그저 기도할 뿐이다. 전쟁의 시대 개인은 무능과 절망을 느끼게 된다. 절망의 시대, 희망의 메시지를 남겨준 사람과 그들의 사상에 기대게 된다. 다시 러셀의 책으로 돌아가면, 아인슈타인은 "크로폿킨의 꿈을 꿨다"고 말한다. 표트르 크로폿킨(1842-1921)은 러시아 철학자, 사상가였는데 절대 군주와 같은 강력한 권력 없이 가능한 이상적인 국가를 꿈꿨다. 그가 러시아인이고 산 시대로 미뤄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로 단정해서는 안된다. 사회주의는 강력한 중앙집중형 정부가, 공산주의는 공산당이라는 중앙 집중형 권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크로폿킨은 그런 사회를 꿈꾸지 않았다. 그의 꿈과 가장 가까운 체제를 들자면 아나키즘 정도가 있다. 그런데 아나키즘이라고 하면 다시 오해가 생길 수 있다. 아나키즘은 무정부 주의라고 치부해 버리기 때문이다. 아니다. 아나키즘은 절대적 권력을 지닌 정부를 거부하는 것이지 정부 자체를 거부하는 게 아니다. 어쨌든 크로폿킨은 사회주의, 공산주의도 아닌, 절대적인 힘을 지닌 중앙집중 권력이 없는 사회를 꿈꿨고 러셀에 의하면 아인슈타인도 그런 꿈을 꾼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지오데식 물리학 세상을 수학적으로 증명했고 중앙 집중형 권력 없는 세상이 가능하다는 일반 상대성 이론 세계관을 말해준 것이다. 절망적인 시대 상황에서 러셀에게 힘을 얻어 아인슈타인의 이론으로 무장하고 이제는 실천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우린 지금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절망을 뚫을 열쇠도 디지털 기술 속에 있다. 디지털 시대는 1989년 www 세상이 열리면서 시작됐다. 그리고 인공지능은 2016년 이세돌 9단을 이긴 알파고를 통해 화려하게 데뷔했는데 2008년 당시 미국의 경제와 금융 붕괴를 정확하게 해석한 구글 비즈니스 모델의 기반이었던 빅데이터를 가치의 기본으로 삼는다. 그런데 우린 2008년 탈중앙집중 체계를 위해 제안됐던 블록체인을 잊고 있다. 아니 투기의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암호화폐 개발에만 이용하고 있다. 러셀이 해석한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 세계관, 크로폿킨의 꿈, 그리고 블록체인 아이디어 모두 중앙집중형 권력 질서에 의지하지 않는 세상으로 이어진다. 유토피아적인 이상향이라고 비판할 수 있지만 아포칼립스로 치닫는 비이성과 탐욕의 세상에서 일반 상대성 이론 세계관, 크로폿킨의 꿈, 그리고 블록체인 아이디어 외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다른 것이 있나 생각하게 된다. 일반 상대성 이론 세계관으로 마음을 다잡고 가치의 보고인 빅데이터 세상에서 빅테크와 중앙 집중형 권력을 위해 일하는 인공지능을 블록체인과 제대로 만나게 함으로써 일반 상대성 이론이 제안한 바로 옆 존재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길만이 절망의 시대를 이겨내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러셀과 아인슈타인은 조언하는 듯하다. 조재원 UNIST 지구환경도시건설공학과 교수 <본 칼럼은 2026년 4월 17일 울산매일 “[매일시론] 러셀이 찾아준 아인슈타인의 꿈”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
2026-04-17
조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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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시론]K-컬처와 인공지능
K-컬처가 일군 문화 생태계
‘K-인공지능’ 성장의 자양분
한국적 서사 핵심 자산 될것
K-컬처가 글로벌 콘텐츠로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BTS의 컴백 라이브는 넷플릭스를 타고 190여개국에 생중계되었고, 케데헌의 골든은 골든글로브, 그래미, 아카데미를 차례로 석권했고, 로제의 아파트는 글로벌 차트를 장악했다. K-팝은 단순히 음악장르에 그치지 않고, 거대한 생태계를 만들어 왔다. K-팝 열풍에서 시작된 관심은 영화와 드라마, 뷰티와 음식, 패션, 화장품, 문학, 애니메이션과 예술 전반으로 확장되었다. 한국 드라마는 주요 스트리밍 플랫폼의 핵심 콘텐츠가 되었고, 한국영화 ‘기생충’과 ‘어쩔수가 없다’는 세계영화제에서 인정받았고, 한강 작가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성공들은 개별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를 증폭시키며, 점점 더 강력한 세계적 흐름을 만들어 내고 있다. 얼마 전 친한파 미국인에게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K-팝 현상에서 재미있는 점은, K-팝 자체의 발전에도 있지만, 다양한 K-컬처 플랫폼이 어떻게 함께 진화하며 시너지를 만들어내는가에 있다는 것이다. 음악은 한국어 학습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고, 영화와 드라마는 한국 음식과 생활 문화로 호기심을 확장한다. 뷰티와 패션은 아이돌과 콘텐츠를 따라 움직이며 소비를 자극한다. 어느 하나의 산업 만으로는 만들 수 없는 효과가, 이 다층적 연결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된다. 이러한 문화 생태계는 한국의 글로벌 존재감을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바꿔 놓았다. 전 세계에서 한국어를 배우려는 수요는 눈에 띄게 증가했고, 전자제품·화장품·소비재를 막론하고 한국 브랜드는 강력한 K-컬처 이미지의 후광을 얻고 있다. 문화는 더 이상 취향이나 여가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 경쟁력의 중요한 축이 되었다. 우리 정부가 K-컬처를 단순한 문화상품이 아니라 핵심 국가 자산으로 다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K-컬처의 성공은 과학기술 영역에서 논의되고 있는 한국적 인공지능의 개발에도 중요한 함의를 던진다. 인공지능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알고리즘과 연산 능력, 반도체와 데이터센터에 주목한다. 물론 이러한 인프라는 두말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그러나 지능은 코드와 연산으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언어, 이미지, 이야기, 감정, 가치관,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같은 데이터를 통해서 학습된다. 이런 의미에서 AI는 본질적으로 문화를 흡수할 수밖에 없다. K-인공지능을 추진한다는 것은 우리의 독자적 기술 파운데이션을 구축한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우리 문화를 흡수하고 이해하고 생성해내는, 문화적 기반을 가진 AI를 만드는 것이다. 한국어, 한국의 역사와 감정, 미학과 서사를 깊이 학습한 거대언어모델은 영어권 지능을 단순히 번역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한국적 경험을 바탕으로 사고하고, 서술하고, 상상하는 AI가 될 수 있다. 이 점에서 한국은 매우 드문 조건을 갖춘 나라다. 한국어와 한글이라는 독립적인 언어와 문자 체계를 지니고 있고, 텍스트·영상·음악·이미지 등 방대한 문화 데이터가 이미 비트 형태로 저장되어 있다. 웹툰과 드라마, 학술논문과 대중 콘텐츠에 이르기까지, 문화적으로 밀도 높은 자료가 기계가 학습할 수 있는 형태로 축적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K-인공지능이 출발할 수 있는 중요한 자산이다. 또한, K-컬처의 성공은 왜 이것이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영화 기생충이나 한강의 소설이 세계적으로 공감을 얻은 이유는 지역성을 지웠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불평등, 상실, 욕망, 소외 같은 보편적 주제를 매우 한국적인 공간과 감수성으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그 힘은 보편성과 특수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나온다. 이는 인공지능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공지능이 점점 더 일반적인 사고 능력을 갖추게 될수록,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AI 시대에 문화가 중요할까 라기보다는, 다가올 시대에는 어떤 문화가 기본값이 되는가이다. 지능은 문명과 문화 속에서 생성된 언어와 경험의 데이터 속에서 학습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K-컬처의 성공은 분명한 교훈을 준다. 세계적 영향력은 자기 문화의 목소리에 대한 자신감, 그 목소리를 다른 문화와 연결시키려는 노력, 그리고 그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시스템에서 나온다. 이제 그 시스템의 한 축에 AI가 자리 잡고 있다. 김영춘 UNIST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 <본 칼럼은 2026년 4월 14일 경상일보 “[경상시론]K-컬처와 인공지능”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
2026-04-14
김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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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칼럼]특이점은 지났다, 이제는 ‘AI 경영’의 시간
AI기술 넘어 조직 운영방식 전환 필요
인구 감소 속 AI경영으로 생산성 유지
울산 산업 데이터로 AI경영 모델 선도
1882년, 에디슨이 뉴욕 맨해튼에 세계 최초의 상업용 발전소를 가동했을 때, 사람들은 전기의 시대가 즉시 도래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전기가 실제로 미국 제조업의 생산성을 끌어올린 것은 40년이 지난 1920년대의 일이었다. 경제사학자 폴 데이비드(Paul David)가 규명했듯, 전기라는 범용기술의 잠재력이 실현되기까지는 공장의 레이아웃을 재설계하고 조직 운영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경영의 전환’이 반드시 뒤따라야 했다. 기술이 아무리 혁명적이어도, 그것을 담아낼 경영 체계 없이는 생산성 통계에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다. 1987년 로버트 솔로우가 꼬집은 ‘생산성 역설’은 AI 시대인 오늘날에도 되풀이되고 있다. 인공지능의 기술적 특이점은 이미 우리 곁을 지나갔다. 대규모 언어 모델은 인간 수준의 추론 능력을 갖췄고, 생성형 AI는 코딩에서 법률 검토까지 전문 영역으로 빠르게 침투하고 있다. 물론 AI 기술 개발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지속적인 투자와 연구가 필요한 영역이다. 그러나 기술 개발에 쏟는 관심에 비해, 이를 경영 현장에서 가치로 전환하는 ‘AI 경영’은 상대적으로 조명을 덜 받아 왔다. AI 엔진을 만드는 경쟁만큼이나, 그 엔진을 장착할 ‘차체(비즈니스 모델)’와 ‘운전자(AI 경영 인재)’를 확보하는 일이 시급하다. 왜 AI ‘기술’이 아니라 AI ‘경영’인가. 에릭 브린욜프슨(Erik Brynjolfsson) 등의 연구가 보여주듯, AI가 총요소생산성(TFP) 향상으로 이어진 기업의 공통점은 단순한 기술 도입이 아니라 조직 재설계와 보완적 인적자본 투자를 병행한 곳이다. 팔란티어(Palantir)의 온톨로지(Ontology) 체계가 주목받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핵심은 특정 방법론이 아니라, 데이터를 경영적 가치로 전환하는 체계적 역량 그 자체가 기업 경쟁력의 원천이 됐다는 사실이다. AI 경영이 국가적 생존 전략이 되는 이유는 인구 구조의 변화에 있다. 거시경제학적 관점에서 노동 투입이 구조적으로 줄어들면, 자본 축적만으로는 수확체감의 벽을 넘기 어렵고 성장의 핵심 동력은 기술과 경영 혁신으로 수렴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2025년 기준 0.80명으로 2년 연속 반등했으나 여전히 OECD 최하위권이다. 산업수도 울산은 지난 10년간 제조업 임금근로자가 3만1000명 감소했고, 40세 미만 청·장년층만 2만9000명이 줄었다. 이 추세가 이어지면 2032년까지 울산 제조업 인력이 7만명 부족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다론 아제모글루(Daron Acemoglu)와 파스쿠알 레스트레포(Pascual Restrepo)의 ‘과업 기반 프레임워크’가 시사하듯, AI는 단순히 일자리를 대체하는 기술이 아니라 기존 과업을 재편하고 새로운 고부가가치 과업을 창출하는 기술이다. AI 경영은 이 과업 재편을 전략적으로 설계해, 적은 인력으로도 생산성을 유지하면서 노동 시장을 고부가가치 중심으로 재편하는 역할을 한다. AI 경영 역량은 실험실이 아니라 산업 현장과 맞닿은 교육과 실천의 접점에서 길러진다. UNIST U미래전략원은 한국동서발전의 AI 전환 추진전략과 거버넌스 체계를 설계하고, 한국수력원자력과 ‘에너지×AI 융합연구혁신센터’ 설립을 추진하는 등 에너지 산업에 AI 경영을 접목해 왔다. 울산시와 전통산업의 미래기술 융합 사업을 기획하고, 한국연구재단과 R&D 매니지먼트 지원체계를 설계하는 등 제도적 기반도 다지고 있다. 경영과학부의 AI 경영 교육, U미래전략원의 산학 프로젝트, 노바투스아카데미의 사회 보급 교육이 삼각 체계를 이루며 현장형 인재를 배출하고 있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비교우위’는 모든 것을 다 잘하는 데 있지 않다. AI 기술 개발은 당연히 지속돼야 하지만, 그와 함께 AI를 산업 현장에 접목하는 ‘경영의 표준’에서 앞서는 것이 한국에 가장 현실적인 전략이다. 울산의 산업 데이터와 UNIST의 전문성이 결합할 때, 대한민국은 AI 기술 수입국을 넘어 ‘AI 경영 모델 수출국’으로 도약할 잠재력을 갖춘다. AI 경영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울산의 공장에서, UNIST의 강의실에서, U미래전략원의 프로젝트 현장에서 이미 시작된 이 흐름을 대한민국 전체로 확산시키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이사야 UNIST 경영과학부 교수·서울대 중소벤처기업정책센터 연구위원 <본 칼럼은 2026년 4월 2일 경상일보 “[목요칼럼]특이점은 지났다, 이제는 ‘AI 경영’의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
2026-04-02
이 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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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성철 칼럼]사진과 인상파, 그리고 AI 시대의 교육
사진 등장에도 미술세계는 더 확장
AI시대 교육도 인간지성 대체 아닌
AI시대 함께 열어갈 인재양성 핵심
1839년, 루이 다게르가 세상에 내놓은 은판사진술은 단순한 기술 발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백 년간 서양 회화가 쌓아온 존재 이유에 대한 근본적인 위협이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 즉 ‘실사(實寫)’를 향해 정교하게 발전해온 회화의 세계에 사진이라는 기계가 갑자기 뛰어든 것이다. 당대 최고 미술아카데미인 파리 에콜 데 보자르는 변화를 거부하며 여전히 고전적 구도와 정밀한 묘사를 최고의 덕목으로 가르쳤다. 그러나 그 견고한 성벽 바깥에서, 몇몇 이단아들이 캔버스를 들고 야외로 나갔다.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그들은 빛이 사물에 닿는 순간의 떨림을, 같은 건초더미라도 아침과 저녁이 얼마나 다른지를,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마음이 느끼는 것을 화폭에 담으려 했다. 1874년, 이들의 첫 전시에 쏟아진 것은 조롱이었다. 비평가 루이 르루아는 모네의 작품 제목 ‘인상, 해돋이’를 빌려 ‘인상주의자들’이라 비웃었다. 그러나 그 조롱받던 이름은 미술사의 가장 빛나는 장으로 남았다. 사진이 실사의 영역을 장악하자, 회화는 오히려 해방되었다. 인간의 감정, 빛의 감각, 시간의 흐름이라는 사진이 담을 수 없는 세계로 깊숙이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사진의 충격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인상파 이후 회화는 점점 더 멀리 나아갔다. 칸딘스키와 몬드리안은 마침내 사물의 형태마저 버렸다. 색과 선과 면 자체가 의미가 되는 추상미술의 세계가 열린 것이다. 사진이라는 기술 충격은 단순히 화풍을 바꾼 것이 아니라,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시각 예술 전체를 다음 단계로 밀어붙였다. 지금, 우리는 또 다른 기술 충격 앞에 서 있다. AI는 이미 정해진 문제를 푸는 영역에서 인간의 지적 능력을 빠르게 추월하고 있다. 법률 문서 검토, 의학 영상 판독, 코드 생성, 논문 및 문서 작성.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고도의 훈련이 필요했던 지적 노동들이 AI 앞에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이 앞에서 교육계는 부랴부랴 AI 리터러시를 교육과정에 끼워 넣고, 창의력과 비판적 사고를 강조하고 있다. 이런 방법론적 대응도 필요하다. 그러나 사진의 충격이 인상파로 끝나지 않았듯, AI의 충격도 교육 방법의 혁신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 충격은 결국 가장 불편한 질문을 고민하게 한다. “교육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취업을 위한 것이라면 AI가 대체하는 직업이 늘어날수록 교육의 입지는 좁아진다. 사회화를 위한 것이라면 AI와 함께 살아가는 시대의 사회란 어떤 모습일까. 민주주의의 토대를 만드는 것이라면 알고리즘이 여론을 설계하는 세계에서 시민을 기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아니면 그 모든 것에 앞서, 교육을 통해 한 사람이 온전한 인간으로 형성되는 것인가. 이 질문들은 교육철학이 오랫동안 붙들어온 물음이다. 그러나 교육 현장은 이 질문을 계속 미뤄왔다. 입시와 취업과 성과 지표라는 일상의 무게가, 근본을 묻는 목소리를 눌러왔다. AI는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교육이 스스로와 마주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유니스트는 이 질문 앞에서 답을 구하기 위한 도전을 시작한다. 이번 달 출범하는 ‘GRIT 인재 융합학부’는 전공의 경계를 허물고 학생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며 프로젝트로 배우는 교육과정이다. 정해진 정답을 빠르게 찾는 훈련이 아니라, 아직 아무도 묻지 않은 질문을 발견하는 힘을 기르는 시도다. 이것은 살롱의 문법을 거부하고 야외로 나갔던 인상파의 실험과도 같다. 그리고 그 너머, 우리는 묻는다. 이 인재를 길러내는 행위가 궁극적으로 어떤 인간을, 어떤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가. 사진의 등장이 회화를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추상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탄생시켰다. AI의 등장 역시 인간의 지성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이 오랫동안 미뤄온 자기 자신과의 대면을 강요하고 있다. 그 불편한 질문을 먼저 붙드는 대학이, 다음 시대를 열어갈 인재를 길러낼 것이다. 캔버스를 들고 야외로 나갈 시간이다. 그 다음에는, 캔버스 위에 무엇을 그릴 것인지를 물을 시간이다. <본 칼럼은 2026년 4월 1일 경상일보 “[배성철 칼럼]사진과 인상파, 그리고 AI 시대의 교육”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
2026-04-01
배 성철
886
[안현실칼럼]창조성 높은 인재도시 울산을 꿈꾼다면
AI 시대 경쟁력은 ‘변혁형 창조성’
혁신친화적 교육·내적동기 양성 중요
영재교육 체계 통한 창조 인재 육성을
인공지능(AI) 시대 인간은 어떤 창조성(creativity)을 추구해야 할까. 마거릿 보든(Margaret A. Boden)은 창조성을 새롭고(new) 놀랍고(surprising) 가치있는(valuable) 아이디어 생산능력으로 정의했다. 보든은 창조성(creativity)을 세 범주로 나누었다. 익숙한 아이디어들을 이전에 없던 방식으로 결합하는 ‘조합형 창조성(combinatorial creativity)’, 기존의 개념 공간에서 아직 발견하지 못한 가능성을 찾아내는 ‘탐색형 창조성(exploratory creativity)’, 그리고 전에는 가능하지 않았던 아이디어를 창출할 새로운 개념 공간의 문을 여는 ‘변혁형 창조성(transformational creativity)’이 그것이다. 창조성이 더 이상 인간의 전유물이 아닌 AI 시대다. 인간과 AI는 창조성에서 어떤 분업으로 갈 것인가. AI가 조합형과 탐색형에서 강점을 갖는다면 인간이 잘할 수 있거나 노력해야 할 창조성은 짐작하는 대로다. 변혁형이다. 우리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은 2002년 인재전략 워크숍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200~300년 전에는 10만~20만 명이 군주를 먹여 살렸지만, 21세기에는 탁월한 한 명의 천재가 10만~20만 명을 먹여 살린다.” AI 시대에 맞게 번역하면 그 천재는 변혁형 창조성의 인재다. 문제는 이런 천재를 어떻게 발굴하고 기를 것인가다. “극히 높은 성과를 올린 인재는 어릴 때부터 그 편린(片鱗)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천재에 관한 연구들이 확인해 준다. 미국 등에서 조기 월반제도를 도입한 과학적 근거도 여기서 나왔다. 하지만 어릴 때 우수한 재능을 가진 아이가 끝내 꽃을 피우지 못한 경우도 있다. 특별한 교육의 필요성이 등장하는 이유다. 특히 어릴 때 탁월한 재능이 있는데도 저소득층 등 환경적 이유로 창조성 발현의 기회를 얻지 못한다면, 개인은 물론 국가, 나아가 인류의 손실이다. 천부적 재능의 발굴도 중요하지만, 그 재능을 살려줄 교육은 그래서 더 중요하다. 창조성 높은 인재의 특성 연구는 차고 넘친다. 이들은 호기심이 많고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 세상을 바꾼 변혁형 혁신가나 가장 성공한 발명가의 특성 연구도 마찬가지다. 기존의 전제나 가정을 의심하고 지금까지 없던 문제에 도전한다. 이런 특성은 쉽게 모방할 수 없지만, 창조성 높은 사람의 행동 특성을 잘 활용하면 누구든 혁신 잠재력을 키우고 소질을 개발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교육과 문화를 ‘혁신친화적’으로 바꿀 수 있다. 창조성과 관련한 또 하나의 연구는 동기에 관한 것이다. 동기는 금전보상, 승인욕구 등 외적동기와 자기 내부에서 분출되는 내적동기로 나뉜다. 연구에 따르면 외적동기는 한계가 있다. 보다 높은 창조성에 도달하려면 내적동기가 더 중요하다. 이런 내적동기는 남이 아닌 자기의 결정성이냐와 내가 이 일을 얼마나 좋아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내적동기 부여는 어릴 때부터일수록 좋다. 지금까지 창조성 인재에 관한 연구를 소개한 이유가 있다. 기업이든 도시든 국가든 창조적 파괴가 생존조건이 됐기 때문이다. 창조적 파괴는 창조성 높은 인재 없이는 불가능하다. 울산은 AI 첨단도시가 되고 싶어 한다. 이 꿈을 실현하려면 울산을 창조적으로 파괴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인재가 울산을 꽉 채워야 한다. 그것도 울산에서 새로운 개념 공간을 열 수 있는 변혁형 창조성의 인재로 말이다. 불행히도 울산은 창조성 인재의 발굴과 양성이라는 전주기(全週期)로 볼 때 취약한 고리가 있다. 시민의 높은 염원으로 탄생한 과학기술원 UNIST가 있지만, 정작 그 UNIST와 초·중등교육을 이어줄 ‘영재고’라는 인재의 다리가 없다. 울산과학고를 UNIST 부설 AI 영재고로 만들 수 있다면 울산, 나아가 세상을 바꿀, 창조성으로 무장한 20대 초·중반 박사 배출이 가능할 것이다. 더 크게 생각하고 더 멀리 바라보는 창조성 인재도시 울산. 오는 6월 지방선거가 끝나는대로 울산의 창조적 파괴를 인재전략에서부터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떤가. <본 칼럼은 2026년 3월 31일 경상일보 “[안현실칼럼]창조성 높은 인재도시 울산을 꿈꾼다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
2026-03-31
안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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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시론]과학자로서의 기업가
AI 발달로 실패비용 낮아지며, 기업가의 역할 과거와 달라져
더 과감히 실험하고 개선해야
인공지능(AI)이 기업의 운영 방식을 바꾸고 있다. AI가 만들어내는 변화는 공장이나 사무실 뿐 아니라, 기업가가 세상을 바라보고 의사결정을 내리는 방식에도 있다. 그동안 기업가는 불확실성 속에서 대담한 선택을 감행하는 인물로 묘사되어 왔다. 하나의 아이디어에 모든 것을 걸고, 성공 아니면 실패라는 극적인 서사를 살아가는 사람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장기적으로 살아남은 기업가들의 행보를 들여다보면, 그 중심에는 반복적인 실험과 학습이 있다. 시장 반응을 관찰하고, 제품과 사업모델 설계의 가설을 수정하며, 실패를 통해 방향을 조정한다. 과거의 실험은 느리고 비쌌다. 시제품 하나를 만드는 데 몇 달이 걸렸고, 고객 반응을 확인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실험의 실패는 곧 재무적 손실로 이어졌고, 이는 기업가로 하여금 실험을 최소화하고 한 번의 선택에 과도하게 집착하게 만들곤 한다. 많은 경우, 실패를 통해 배우기보다는 실패를 피하는 것이 합리적인 전략이었다. AI는 이 조건을 바꾸고 있다. 오늘날 기업가는 AI를 활용해 수많은 대안을 동시에 생성하고 비교할 수 있다. 제품 디자인, 기능 구성, 가격 전략, 마케팅 메시지, 심지어 비즈니스 모델의 구조까지 빠르게 실험할 수 있게 되었다. 소비자 행동 데이터는 실시간으로 분석할 수 있게 되었고, 작은 변화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도 예측이 가능하게 되었다. 실험의 속도와 규모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한 것이다. 이 변화는 기업가의 탐색(exploration) 방식을 바꾼다. 이제 하나의 아이디어에 모든 자원을 투입할 필요가 없다. 여러 가능성을 병렬적으로 시험하고, 시장에 실제로 진입하기 전 단계에서 상당 부분을 검증할 수 있다. 실패의 비용이 낮아지면서, 역설적으로 더 과감한 탐색이 가능해진다. 이는 혁신이 대기업이나 자본을 가진 소수에게만 허용되던 구조를 완화하고, 더 많은 실험을 시장에 허용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동시에 AI는 활용(exploitation) 능력을 크게 강화한다. 무엇이 잘 작동하는지를 빠르게 포착하고, 성과가 확인된 요소를 정교하게 개선할 수 있다. 과거에는 새로운 기회를 탐색하는 것과 기존 성과를 극대화하는 것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다면, 이제는 두 과정이 빠른 피드백 속에서 순환하는 구조로 결합된다. 실험과 개선이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의 경영 루틴이 되는 것이다. AI 시대의 기업가는 더 이상 직감과 결단만으로 움직이는 모험가가 아니다. 점점 과학자에 가까운 존재로 변하고 있다. 과학자는 모든 실험이 성공할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패하더라도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실패의 유무가 아니라, 실패가 정보를 남기는 방식이다. AI는 기업가가 이러한 과학적 실험 논리를 실제 경영에 적용하도록 돕는다. 실패한 제품이나 전략은 좌절이 아니라 데이터가 된다. 학습의 속도와 질이 경쟁력이 되는 시대다. 물론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과학적 실험에는 명확한 가설이 필요하다. 아무 질문 없이 데이터를 돌리는 것은 실험이 아니라 무작위 탐색에 가깝다. 어떤 문제를 풀고 싶은지, 무엇을 검증하려는지 정의하는 일은 여전히 기업가의 몫이다. AI는 답을 계산할 수 있지만, 어떤 질문이 중요한지를 정해주지는 않는다. 또 하나의 위험은 과신이다. AI가 제시하는 결과는 종종 매우 정교하고 확신에 차 보인다. 그러나 그 결과는 특정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전제한 가정 위에 서 있다. 단기 지표에 최적화된 판단이 장기적인 기술 변화나 사회적 맥락을 놓칠 가능성도 크다. AI가 강력해질수록, 인간의 해석 능력과 비판적 사고는 오히려 더 중요해진다. AI는 기업가의 역할을 재정의한다. 직감과 결단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 위에 체계적인 실험과 검증이 덧붙는다. 더 많은 아이디어를 실험할 수 있고, 더 많은 기회가 탐색된다. 실패는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더 빨리 그리고 더 저렴한 비용으로 더 많이 일어난다. AI 시대의 기업가는 직감과 결단으로 움직이는 모험가를 넘어서 점점 더 과학자에 가까운 존재로 변하고 있다. 불확실성이 상수가 된 경영 환경에서, 이러한 과학적 기업가 정신이야말로 지속적인 기업 경쟁력의 원천이 될 것이다. 김영춘 UNIST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 <본 칼럼은 2026년 3월 12일 경상일보 “[경상시론]과학자로서의 기업가”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
2026-03-12
김 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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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논단] 흔들리지 않는 미래 에너지의 안정적·지속적인 확보
탄소중립과 전력수요 증가 속 원자력 필요성
에너지 산업 기반 갖춘 울산 원전 입지 여건
우리는 지금 산업경쟁력 강화와 탄소중립 실현을 위한 에너지 확보의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기후위기에 대응하고 급증하는 전력 수요를 감당할 대규모의 무탄소 전원을 언제 어디서나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이는 국가 에너지 안보를 확립하는 지름길이자 지역 산업 생태계의 선순환 구조를 완성하여 지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원동력이다. 에너지 산업 융복합단지와 원전 클러스터가 완벽하게 어우러진 에너지 산업의 심장 울산에 원자력발전소가 새로 유치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70년대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 아흐메드 자키 야마니(Ahmed Zaki Yamani)는 “돌멩이가 없어서 석기시대가 끝난 것이 아니다(=The Stone Age came to an end, but not because we ran out of stones.)”라고 하였다. 자원의 부족이 아닌 과학기술의 진보가 시대의 패러다임을 바꾼다는 반세기 전의 그의 통찰은 화석연료가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오늘날 현실이 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원자력은 국가 에너지 안보를 굳건히 하고 산업 인프라를 지탱하는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한 대규모 탄소중립 에너지원이다. 탈원전(脫原電)을 외쳤던 벨기에, 스웨덴, 스위스, 이탈리아 등 유럽 선진국들을 보라! 지구촌의 전쟁이 불러온 에너지 위기를 돌파하고 급증하는 산업전력 수요를 충당할 친환경 에너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원자력으로 회귀하는 길을 걷고 있다. 2023년 원전 폐쇄를 모두 완수하며 탈원전을 완료한 독일의 원전 재가동 논의는 ‘탄소 넷제로(Net-Zero)’를 달성하면서 국가경쟁력을 강화하고 에너지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대안이 원자력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원전이 탄소중립을 위한 주요 전력원임을 과학기술적 사실을 기반으로 재인식한 결과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울산은 원전 건설과 운영 경험을 지속적으로 축적해 오고 있는 에너지 거점 도시로서 광역 교통망, 기반 인프라, 부지, 높은 원자력 환경 공공 신뢰도 등 최적의 원전 유치 여건을 확보하고 있다. 특히, 현재 운영 중인 새울 1, 2호기는 우리나라가 독자 개발한 3세대 개선형(GEN III+) 가압경수형 원전으로, K-원전의 표준 모델(APR1400)이다. 이는 아랍에미리트(UAE)에 수출하여 운영 중인 바라카 원전의 그것과 동일한 노형으로 그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입증하였다. 우리나라는 1978년 첫 상용 원전 도입 후 수십 년 동안 축적된 원전 건설 및 운영 역량, 연구 개발을 바탕으로 원전 도입국에서 원전 수출국으로 탈바꿈하며 글로벌 원자력 선도 국가의 반열에 올라서 있다. 이렇듯 세계적으로 원전 기술력을 인정받은 우리나라의 주력 원전 노형인 APR1400이 건설, 운영되고 있는 울산의 새울 신규 원전 유치는 지극히 자연스러우며 전략적으로도 주저할 이유가 없다. 아니, 울산은 신규 원전을 수용하기 위한 최적의 맞춤형 인프라와 검증된 환경을 이미 확보하였다. 1,000MW급의 대규모 전력이 소요될 인공지능 데이터센터(SK AI 데이터센터)가 울산에 들어선다. 이는 수요처와 에너지원의 인접성을 통한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미래 산업경쟁력의 핵심임을 직접 방증하는 것이다. 전통적 제조업뿐만 아니라 인공지능, 전기차, 반도체, 스마트팩토리 등과 같은 전력 다소비 첨단산업에 대한 안정적인 전력 공급은 산업 생존의 필수 요소다. 마이크로소프트를 비롯한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원전 프로젝트 투자 및 원자력발전소 직접 전력 구매 행보는 안정적인 대규모 무탄소(無炭素) 전원 확보의 해답이 원자력에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신규 원전 유치를 통한 대규모의 안정적 에너지원 확보는 석유화학, 자동차, 조선 및 수소 등 울산의 주력 산업 활성화를 위한 필요조건이다. 더불어, 원전 건설 과정에서의 대규모 고용 창출과 원전 지역 지원금 등은 지역 경제를 향상시키고 지역민의 삶을 풍부하게 하는 실질적인 성장 엔진이 된다. 원자력을 통한 에너지 확보가 불가피한 현실로 다가온 상황에서 탄소 중립, 지역 경제 성장, 국가 에너지 안보 등 세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을 수 있는 원전의 신규 유치는 선택이 아닌 사명이다. 입지 조건을 모두 갖춘 새울 원자력부지에 신규 원전을 추가로 짓는 것은 이제 지역의 실천적 의지와 시간의 문제다. 원전의 건설부터 운영, 해체까지 아우르는 원전 전주기 생태계의 새로운 이정표가 울산에서 세워지기를 기대한다. <본 칼럼은 2026년 3월 12일 울산제일일보 “[교수 논단] 흔들리지 않는 미래 에너지의 안정적·지속적인 확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
2026-03-12
김 희령
559
[최진숙의 문화모퉁이(30)]실수로 만들어진 가나슈
실수·위험 제한하는 교육 환경
아이들이 단단해질 경험 기회 차단
다양한 실패가 건강한 성장 이끌어
새 학기, 새 학년을 맞이하는 3월의 교실은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하다. ‘새로운 도전’이라는 희망과 ‘틀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공존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최근 쉬는 시간 중 축구를 하다가 다치는 아이가 생겼다는 이유로 축구를 금지한 초등학교가 있다. 운동회에서 승자와 패자를 가르지 않도록 무승부로 끝을 내자는 학교도 있다고 한다. 또한 초등학교에서 공개적으로 상장을 주지 않고 수상자에게 조용히 따로 전달한다는 소식도 있다. 언뜻 보면 다치거나 패배한 아이들의 몸과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왜 살면서 상처를 입으면 안 되는지 의문이 든다. 학기 중 시험을 본 후 몇 등인지도 알고, 속상하거나 뿌듯해 보기도 하고, 심기일전해 보기도 하고, 선생님께 혼도 나고, 칭찬도 받고, 전교생 앞에서 상장도 받아보고, 상을 받은 친구들 축하도 해주고, 점심 때 축구와 피구를 하다가 다쳐도 깔깔대며 다시 뛰어다닐 수 있는 학교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아이들은 저절로 어른이 되지 않는다.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문턱을 넘어야 한다. 바로 고통, 위험, 실패, 공동체의 냉혹한 시선을 견뎌내는 과정이 그것이다. 인류학자들은 이를 ‘통과의례(rite of passage)’라 불러왔다. 통과의례는 잔인해 보이지만, 한 사회가 한 인간을 사회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책임지겠다는 신호이다. 고통을 통과한 사람만이 권리뿐 아니라 책임을 함께 부여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그러한 통과의례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아이들은 어려운 일을 겪으며 성장하기 보다는 처음부터 다치지 않도록 보호받는다. 상처받지 않도록, 실패하지 않도록, 좌절을 겪지 않도록 관리된다. 물론 이 변화의 배경에는 과거 교육 현장의 차별, 체벌과 억압의 기억이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단단해지는 경험’까지 함께 제거되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자녀 교육 담론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아동 인권’이다. 아이는 존중받아야 하고, 보호받아야 하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 모두 옳은 말이다. 그렇다면 동시에 아이는 세계의 냉혹함을 배울 수 있는 길도 열려있어야 하지 않는가? 권리는 선언으로 주어지지만, 책임은 경험으로 학습된다. 넘어져 본 아이만이 다시 일어나는 법을 알고, 실패를 겪어본 사람만이 좌절을 관리하는 기술을 갖는다. 그러나 부모들은 자녀가 넘어지기 전에 미리 손을 내밀고 길에 놓인 돌멩이를 치워 줌으로써 위험한 환경 자체를 경험할 기회를 제거한다. 아이는 보호될지 모르지만, 결코 돌멩이가 있는 길을 비켜 가는 법을 익히지 못하며, 설사 넘어졌다 해도 일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19세기 프랑스의 어느 초콜릿 작업장에서 한 견습생이 실수로 끓는 생크림을 초콜릿이 담긴 그릇에 쏟아버렸다. 이를 본 스승이 버럭 화를 내며 ”이 가나슈(Ganache, 바보 같은 녀석)야!“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버리려던 그 ‘실패작’ 초콜릿을 섞어보니, 전례 없이 부드럽고 매혹적인 크림이 탄생했다. 그 ‘바보 같은 실수’가 없었다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오늘날의 ‘가나슈’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또 다른 사례는 페니실린이 있다. 실험실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바람에 생겨난 곰팡이가 전 인류를 구해낸 항생제가 될 줄을 그 누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실수와 실패는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계속 시도하다 보니 우연한 성공의 길로 갈 수도 있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교육과 제도가 아이들을 독립적이고 책임감 있는 성인으로서 성숙시키지 못하고 있음에 대해 어른들의 반성이 필요한 때이다. 수많은 실수와 실패의 경험들이 아이들을 성장하게 하고, 성인이 되었을 때 다가올 혼란과 고통을 극복할 능력을 길러 줄 것이다. <본 칼럼은 2026년 3월 11일 경상일보 “[최진숙의 문화모퉁이(30)]실수로 만들어진 가나슈”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
2026-03-11
최 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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